알가에 카데르 끼얹

1차 2016. 8. 10. 00:38

피곤하다며 돌아 온 그녀는 일찍 자리에 뻗었다. 겨우 받아 온 오프는 질질 끌리고 끌렸고, 병원은 새벽에야 그녀를 놓아 주었다. 아까운 내 오프! 외치는 그녀는 알가의 집에 드러누워 버둥거렸다. 치맛자락이 올라가는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발을 휘저어대는 카데르에게 다가 간 알가는 협탁에 찻잔을 놓고 베드트레이에 올라가있는 30데니어짜리 스타킹에 감싸인 발을 쳐다봤다. 흔한 정장차림의 그녀는 발치에 다가온 알가를 보자마자 퇴근하기 전 바른 루즈가 채 지워지지 않은 입술 끝을 올려 웃었다. 벗겨줘. 알가의 다리를 타고 카데르의 발끝이 서서히 올라왔다. 바지가 끌어올려지다 걸리고, 천이 구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편한 면 추리닝을 타고 올라가던 가느다란 발끝이 바지 고무줄에 끄트머리를 걸쳤다. 투명하게 비치는 스타킹 너머로 예쁘게 관리 된 발톱과, 곱게 발려진 페디큐어가 보였다. 그녀답게 검붉은 색이다. 유독 색스러운 검붉은색이 어울리는 피부다. 알가는 한숨을 쉬고 한걸음 다가섰다. 가느다란 발목을 넘어, 살집이 조금, 아주 조금 붙어있는 종아리가 골반즈음에 닿았다. 그와 함께 알가가 파고들면서 벌어진 허벅지 바깥쪽이 정장 스커트의 좁은 폭을 이기지 못 하고 조금 눌렸다. 그래도 단련된 몸이라고 눌린 자국이 탄력 있게 패이는 모습은 퍽 보기 좋은 광경이었다. 알가는 몸을 숙여 치마 속으로 손을 넣었다. 가만히 누워서 발끝을 까딱거리는 카데르는 입술의 루즈가 뭉친 기분이 든 건지 입술을 말아 문 채 문지르고 있었다. 치마 위로 손모양이 도드라진다. 검은 치마가 강제로 늘어난 만큼 형광등에 반질거렸다. 손바닥을 허벅지에 마주한 채 스타킹의 재질을 타고 올라가다 손끝에 걸리는 속바지를 살짝 잡고 끌어내릴 때, 카데르는 허리를 들었다. 짧은 속바지가 작은 골반에 걸려있다 완만한 엉덩이라인을 따라 내려오다 허벅지에 걸쳐지는 과정이 손가락 끝으로 확연하게 느껴졌다. 그러는 도중에도 카데르는 짧게 다듬어진 손톱이 길진 않았는지 보고 있다. 속바지가 발목에 걸쳐지자 발끝을 세운 카데르가 발을 휘휘 휘저어 속바지를 던졌다. 휙 날아 바닥에 툭 떨어진 속바지를 눈으로 쫒던 알가가 삐뚜름하게 카데르를 바라봤다.

“당신이 치울 겁니까?”

“여긴 네 방인데?”

망할. 욕하는 알가를 뒤로한 채 스타킹~ 하고 발을 휘휘 휘둘렀다. 알가는 어디서 그 흉기 같은 걸 휘두르냐, 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그만 두기로 했다. 겉보기엔 연약해 보이는 다리일 뿐이다. 하얀 이불 위에 멋대로 흐트러진 머리는 정리하지 않아도 충분이 예쁜 컬을 유지하고 있다. 신기한 머리라고 생각한 알가는 카데르의 허리를 한쪽으로 반쯤 들고 스커트의 지퍼를 내렸다. 그대로 쑥 당기면 도톰한 엉덩이에서 조금 느려지다 쑥, 치마가 빠진다. 까만 속옷에 스타킹만 입고도 부끄러움은 없는지 그녀는 허리를 슬쩍 들어준다. 알가는 익숙하다는 듯, 한 치의 미동도 없이 안 그래도 살이 없는 허리를 꽉 잡고 있는 밴드와 허리의 살갗 사이에 엄지손가락을 넣어 밴드를 충분히 늘리며 아래로 내려갔다. 스타킹은 겹쳐지면서 점점 까만색으로 짙어져갔다. 그러다 발끝을 잡아당기면 스타킹은 부드럽게 다리를 놓아준다. 하얀 맨다리와 검붉은 페디큐어가 발린 발 끝, 까만 속옷이 도색적이다. 그러나 섹시한 것도 백일을 보면 아무렇지 않은 법이라, 알가는 몸을 꽉 죈 셔츠가 불편하다며 손을 휘젓는 카데르의 셔츠 단추를 풀었다. 가슴 쪽이 조금 팽팽하던 셔츠의 단추를 풀어주면 단단하게 모여 있던 가슴이 아주 조금 풀어진다. 그 사이로 비치는 건 하얀 나시와, 그 틈새로 보이는 까만 브래지어다.

“만세.”

“만세~”

쭉 뻗은 팔 너머로 셔츠를 당겨 벗겨내고 셔츠와 떨어져 있는 속바지, 팔에 걸어놓은 스타킹을 세탁물 망에 넣어 놓고 편한 맨투맨과 반바지를 들고 오면 어느 새 브래지어를 벗어서 손에 달랑달랑 흔들고 있다. 부끄러움은 스크램블 애그와 볶아 먹었는지 맨다리에 바지를 입혀주면 순순히 허리를 들어준다. 맨투맨을 쑥 씌워주면 작은 머리가 쏙 하고 올라온다. 그리고 속에서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흰 나시를 맨투맨 아래로 쑥 빼고는 팔을 마저 끼워 입고 다시 벌러덩 대자로 눕는다. 갑갑하게 옥죄고 있던 것들이 사라지자 밀가루 반죽처럼 퍼지는 카데르를 보던 알가가 욕실로 가서 손을 씻고 메이크업 오일을 들고 나왔다. 서랍에서 방수천을 꺼내 침대에 깔고, 메이크업 오일을 두고, 비누냄새가 폴폴 나는 손가락에 오일을 짜 올렸다. 차갑지 않도록 손을 비벼 체온으로 오일을 데운 그는 화장이 겹겹이 쌓인 얼굴에 손끝부터 손바닥 면까지 고루 이용해 문질렀다. 눈 떠요, 감아요. 이럴 때만 말을 참 잘 듣는다. 저자극성 오일이 화장을 녹이자 오일통을 들고 손을 씻으러 들어 간 그는 손가락에 묻은 펄과 섀도우, 루즈의 흔적을 보다 매번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비치되어있는 폼클렌징으로 손을 꼼꼼히 닦고, 스팀기에 들어있던 작은 수건을 두어개 들고 나왔다. 손바닥이 익을 것처럼 따끈해서 이리저리 펴서 식히며 걸어오는 알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카데르는 배시시 웃었다. 화장이 이상하게 지워져있는 얼굴은 우습다며 적당히 식은 수건을 얼굴에 올려 부드럽게 마사지하며 닦아냈다. 수건을 뒤집어 한 번 더 말끔하게 얼굴 근육 모양대로 닦아주고, 방수포 위에 올려 둔 다음 깨끗한 수건으로 한 번 더 얼굴을 덮고 마사지 해 준다. 카데르는 이 순간을 가장 좋아했다. 더. 하는 말에 엄지손가락으로 턱 아래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니, 시원하다는 듯 탄식이 흘렀다. 깨끗하게 닦아내자 뽀송뽀송한 얼굴이 드러났다.

“화장까진 지워주겠는데, 씻어야죠.”

카데르는 말없이 손을 뻗었다. 예, 예. 알아 모십죠. 알가는 허공에서 휘적거리는 손을 수건으로 잡아다 지압했다. 손톱이 좀 길었네요. 씻고 나오면 다듬어 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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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아시의 첫 반응은 침묵이었다. 두 번째 반응은 고개를 조금 기울여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었고, 세 번째 반응은 엄마 어디 있니? 였다. 네 번째 반응은,

"형 이름이 보쿠토니?"

였다. 아, 그러니까, 아카아시의 이 침착한 질문을 거슬러 올라가면 원인결과 설명이 가능 해 진다.



아카아시는 목요일 점심시간이 끝나기 직전에 보쿠토의 데이트하자, 데이트! 의 발언을 들었다. 주말 연습을 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려 했으나 방과 후, 부활동이 끝나고 직접 연습을 감히 몸소 도와주신다는 어거지로 주말 데이트, 라고 이름만 붙은 약속을 잡았다. 나쁘진 않았지만, 그래도 단 둘이 데이트, 라는 이름의 익숙한 약속은 언제나 뻣뻣한 보쿠토를 살살 달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해서 각오를 조금, 검지와 엄지가 겨우 맞붙지 않을 만큼의 간격만큼 했다. 그러나 약속장소는 놀이터였다. 아카아시의 반듯한 이마가 눈썹이 슬쩍 꿈틀대는 것에 따라 구겨졌다가 펴졌지만 보쿠토는 흘긋 눈치만 봤다. 그네라도 타고 싶으신 건가요? 반걸음 물러나면서 던진 질문에 빽 소리를 지르며 아니라고 그렇게 유치하다고 놀리는 얼굴로 보지 말라기에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이런, 이건 깜짝파티 라거나, 몰래카메라 수준이 아니었다.

아이답게 울망 하지만 한껏 치켜 올라간 눈매와, 위로 쭉 뻗은 앞머리가 짙은 눈썹. 싹싹 잘 넘어간 머리까지 보쿠토를 쏙 빼닮은 아이가 놀이터 앞, 약속장소에 나와 있었다. 아카아시는 처음에 그가 보쿠토의 숨겨둔 동생이거나, 동생이거나, 동생인 줄 알았다. 적어도 자식은 아니겠지. 아카아시는 특유의 그 아카아시! 를 듣고 조용히 머리를 반대편으로 기울였다가 허리를 숙였다.

"그래, 네 형은 어디 있니?"

아카아시가 쪼그리고 앉아야 겨우 눈높이가 맞을 아이는 하얀 후드에 황갈색 반바지, 짙은 남색의 어린이용 스니커즈를 신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작은 몸으로 열심히 파닥거렸다. 이상해! 이상해! 네, 네. 그러니까 뭐가요? 아카아시는 쪼그리고 앉은 무릎 위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조용하고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퍽 무서웠는지 아이가 어, 네가 무서워. 라고 말했다. 어딜 봐서 그게 무섭다는 얼굴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아카아시는 일단 아이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젖살이 통통한 흰 뺨이 찹쌀떡 같았다. 찔러보고 싶은 충동을 놀이터 한가운데 있는 모래사장의 성을 밟듯이 꽉 밟아 형체도 알 수 없게 짓밟아버린 후 아이가 들고 있는 건 없는지, 손목이나 목이나 혹은 발목에 뭔가 신원을 알 수 있는 것이 붙어있진 않는지 살펴보았다. 그 어디에도 미아방지용 태그는 붙어있지 않았고, 그는 절망했다. 보쿠토씨? 목소리 끝을 높이는 부름에 발딱 고개를 든 아이가 응! 하고 발랄하게 대답했다. 이름이 불린 게 기분이 좋았는지 제자리에서 팔짝팔짝 뛰며 응! 응! 하고 만세를 한다. 아카아시는 그 점프력을 보고 아이가 보쿠토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쩌다 그런 모습이 된 겁니까?"

"으응?"

순진무구한 눈동자가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라고 말했다. 눈으로 말하고 몸으로 말하고 그가 돌돌 감은 공기의 분위기로 말한다. 대체 무슨 화법인지 알 수 없었다. 아카아시는 일단 발갛고 통통한 뺨을 손끝으로 살짝 찔러보았다. 아차 싶었을 땐 이미 아카아시의 잘 다듬어진 손끝이 하얀 볼에 발긋한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뭐 하는 거냐는 동그란 눈동자에 손을 거둔 그는 턱을 괴고 이래선 시내 데이트는 무리겠네요, 하고 말했다. 파랗게 보일 정도로 깨끗한 눈동자에 습기가 차오르며 반짝거렸다. 그러니까, 시내 데이트가 안 될 것 같다고요. 무릎에 손을 디디며 일어난 아카아시는 울음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눈앞에 조심히 손을 내밀었다.

"놀이터 데이트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차라리 좀 더 어울리는 모양새가 되었다며 생각 한 아카아시는 아이가 진짜로 보쿠토든 아니든 약속시간에 그 모습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은 것은 보쿠토 이므로, 이대로 놀고 있어도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어떻게 사람이 유아퇴행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만약 이 아이가 보쿠토가 맞다면, 반쯤은 확신하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보쿠토가 정말로 맞다면, 기억은 제대로인 것 같았지만 하는 행동거지가 영락없는 어린아이다. 일단은 놀이터 데이트든, 놀이터 미아 임시 보호든 간에 데리고 놀려면 놀이터 안으로 걸어 들어가야 했다. 아이- 보쿠토는 아카아시가 내민 손을 꼭 잡았다. 보쿠토의 손은 아주 작아서 아카아시의 가느다란 손의 중지와 약지를 겨우 모아 쥘 수 있는 수준이었다. 따뜻한 손이 두 손가락 두 번째 마디를 가득 감아오는 것에 잠시 시선을 둔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그네로 데려갔다. 두 사람의 걸음걸이는 심각하게 차이가 나서, 아카아시가 한 걸음을 걸을 때, 보쿠토는 종종걸음을 다섯 번 걸어야 했다. 그리고 아카아시는 손을 잡게 하느라 반쯤 기울어진 상체 때문에 허리가 아파왔다. 그네까지 단 세 걸음 걸었을 뿐인데 세상의 온 피곤함이 그의 것인 양 느껴졌다. 아카아시는 이젠 앞질러서 걸어가려는 보쿠토를 슬쩍 멈춘 후에 가느다란 무릎 뒤에 팔을 넣어 걷어 올리듯이 안았다. 깜짝 놀라 아카아시의 목을 감싸 안은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팔에 앉아 그네까지 무사히 도달했다. 아카아시는 이동하는 그 짧은 시간동안 발랄한 목소리와 제스쳐는 어디로 숨겨 둔 건지 조용히 아카아시의 목만 꼭 껴안은 보쿠토가 의외로 귀여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넘어지지 않도록 받쳐 잡고 겨드랑이 아래에 손을 넣어 들어 올리자 작은 몸이 양 손에 꽉 찬다. 엄지를 슬쩍 문지르니 한참 연약한 어깨가 덜 여문 채 말랑했다. 아이의 몸은 도톰한 후드 너머로도 따뜻함이 번져 올 정도로 따끈했다. 흔들거리는 그네 위로 몸을 가져다 대자 무의식적으로 무릎을 들어 올려 그네위에 엉덩이를 안착한 보쿠토가 그네 줄을 꼭 잡고 동그란 눈으로 아카아시를 쳐다봤다. 아카아시는 입 꼬리를 조금 당겨 웃었다.

"이제 조금씩 흔들어 줄게요. 그네, 타고 싶었던 거 아니었어요?"

통통한 이마와 볼에 발갛게 열이 쏠렸다. 아카아시도 같이 탔으면 좋겠어. 작은 입을 크게 벌리며 또박또박 말 하는 보쿠토의 얼굴은 엄마의 립스틱으로 몰래 장난 친 아이처럼 꽃분홍색이었다. 아카아시는 음, 좀, 작을지도. 하고 고민하다가 얼마 전에도 어른이 무릎에 아이를 앉히고 그네를 타며 놀던 모습을 기억해냈다. 고개를 끄덕이며 보쿠토에게 느리게 손을 뻗자 작은 손을 바짝 뻗으며 품에 답삭 안긴다. 짧은 다리가 몸에 꼭 들러붙느라 셔츠에 작은 신발자국이 남았다. 아카아시는 한 손으로 보쿠토의 엉덩이를 잘 받쳐서 떨어트리지 않게 조심하며 그네에 앉았다. 다행히 비좁지는 않았다. 엉덩이를 받친 팔이 사라지고 허벅지에 아카아시와 마주보고 앉은 보쿠토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환한 웃음에 구김살이라곤 찾아볼 수 없어서 아카아시는 그네 줄을 팔에 걸고, 보쿠토의 등허리를 손바닥 가득 받쳤다. 작은 몸은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 묵직했다. 신난다며 들썩거리는 몸이 허벅지 위에서 통통 튀었다. 발로 땅을 슬금슬금 밀어냈다가 앞으로 쭉 뻗으며 그네가 충분히, 그러나 위험하진 않을 정도로 흔들리게 하며 아카아시는 놀이터 입구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정말로 보쿠토는 자신이 알던 모습으론 나타나지 않을 심산인가 보다. 작은 등을 단단히 받친 손목에 걸린 시계를 보니, 약속시간은 이미 진즉에 지나 있었다.



"아카아시, 무슨 생각 해?"

"당신 생각이요."

"왜?"

"제가 당신을 다리에 앉히고 그네를 타게 될 줄은 몰랐거든요."

높은 목소리가 새처럼 짹짹거렸다. 차분하게 조곤조곤 대답하자 작은 몸이 답삭 붙어온다. 아카아시는 내가 싫어? 봉긋한 이마가 셔츠에 닿았다. 얄팍한 셔츠는 아이의 체온을 채 막아주지 못했다. 이마가 닿은 가슴팍이 따뜻했다. 싫지 않아요. 땅을 조금 힘주어 박찬 아카아시가 싫다면 이러고 있지 않았을 거예요. 라고 말하자 아카아시의 허리 뒤로 넘어가있던 작은 발이 앞으로 당겨졌다. 그러니까, 아카아시의 다리 위에 보쿠토가 벌떡 서려고 했다. 정말?! 외치는 목소리가 꽤 기쁜 것 같았다. 아마 그들이 가만히 앉아있는 상태였다면 갑자기 일어난 보쿠토가 물컹한 근육을 잘못 밟고 넘어지는걸 아카아시가 잡아주고, 위험했다며 잔소리를 하고, 혼나느라 기가 죽은 보쿠토를 다시 어화둥둥 내 꽃님아 달래주는 일상적인 패턴의 이야기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들은 그네 위였고, 바로 직전에 아카아시가 힘주어 땅을 박차서 뒤로 몸이 붕 뜬 상태였다.

"아!"

짤막한 목소리가 채 탄성인지, 비명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아카아시가 황급히 보쿠토를 받아내려 했으나 그네 줄에 팔이 걸렸고, 작은 몸은 그 무게가 무색하게 홀라당 넘어가 버렸다. 뒤통수부터 떨어진 작은 몸이 그대로 모래 위를 두 바퀴를 굴러갔다. 놀란 아카아시가 벌떡 일어나 그네를 내버리고 굴러간 몸을 일으키자, 다행히 상처는 없는 얼굴이 울상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우, 울지 않을 거야. 작은 입술에 잔뜩 힘을 준 채 인상을 쓰고 눈물을 달고 있는 보쿠토가 띄엄띄엄 울지 않을 거라 웅얼거렸다. 하지만 흰 살갗은 연약했고, 놀이터의 모래보다 강도가 약했다. 하얀 무릎에 쓸린 자국과 함께 핏망울이 송골송골 배어나왔다. 상처의 쓰라림을 알아 챈 몸이 반사적으로 눈물을 찔끔 내보내, 동그란 눈에 한가득 눈물이 차올랐다.

"이런…."

황급히 미끄럼틀 끄트머리에 보쿠토를 앉힌 아카아시가 머리부터 시작해서 옷이나 바지, 신발에 묻은 흙을 털었다. 긴 손가락이 뒤통수를 조심스레 헤집고, 후드를 뒤집어 모래를 털고 손바닥을 부드럽게 쓸었다. 무릎에 난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연약한 살갗에 모래알이 박혀 있었다. 그가 충분히 자란, 그의 선배였다면 그깟 모래 쯤 혼자 털어 내거나, 양호실로 끌고 가 소독약이 묻은 솜으로 닦아줄 수 있었을 테지만, 눈앞의 보쿠토는 스스로의 눈물샘조차 제 마음대로 하지 못 하는 어린 상태였다. 그래도 모래알이 박힌 상태로 뭘 할 순 없어서, 주머니에서 황급히 손수건을 꺼낸 아카아시가 얇은 발목을 잡아 굽혀진 무릎을 조금 펴자 앓는 소리가 났다.

"죄송합니다. 잘 잡았어야 했는데…."

아카아시가 손수건을 차마 대지 못 하고 상처 난 무릎만 쳐다보고 있자 아직 모래자국이 둥글게둥글게 패인 손바닥이 아카아시의 뺨을 찰싹 소리 나게 잡았다. 아카아시는 우습게도 그 순간, 이 아이는 분명히 보쿠토씨 라고 확신했다. 홧홧한 뺨은 내일쯤엔 부을지도 모르겠다 싶을 정도로 따끔거렸다.

"아카아시가 잘못한 건 없어. 내가 일어섰기 때문이야."

눈물을 그렁그렁 담은 눈이 어린 맹금류답게 선명하게 반질거렸다. 시선을 올곧게 맞추고 분명한 의견을 내놓는 모습은 오늘 멋진 모습으로 나오지 않은 그의 에이스의 경기 중 모습을 닮아 있었다. 울지 않을 테니까, 응? 큰 눈이 조금 휘어지며 최대한 웃으려고 하는 모습이 때와 맞지 않게 깜찍했다. 아카아시는 볼에 닿은 작은 손바닥에 뺨을 비볐다. 그리고 손수건을 쥔 손을 뒤집어 상처 난 다리의 신발바닥을 받치고, 발목을 감싸고 있던 손을 미끄러트려 조금 통통한 종아리를 감쌌다. 아카아시의 머리가 숙여졌다. 또래보다 길고 까만 속눈썹이 눈동자를 가리고, 보쿠토의 무릎에 가느다란 숨소리가 닿았다.

"아카…?"

힐끗 보쿠토를 올려다 본 아카아시가 핏망울이 송글송글 맺힌 무릎에 입술을 내렸다. 상처에 날숨이 닿아 간지러움이 올라왔고, 보쿠토가 흠칫 몸을 굳혔다. 조금 머리를 뗀 아카아시의 아랫입술에 보쿠토가 본 그 어떤 색보다 선명한 붉은색의 물방울이 한 방울 묻어있었다. 쉬이-. 달래는 소리가 바람이 되어 무릎을 간지럽혀서 보쿠토가 깜짝 놀라 고개를 황급히 끄덕였다. 아카아시는 눈매를 조금 휘며 웃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작고 둥근 무릎에 아무런 립 제품도 바르지 않은 입술이 경건할 정도로 가볍게 닿았다가 벌어져 촉촉하게 상처를 덮었다. 어린 아이의 체온보다 높은 온도의 공기가 상처를 감싸고, 이내 조금, 아주 조금 까끌 하고 말랑한 것이 상처에 넓고 얕게 닿았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상처가 축축한 타액으로 범벅이 되었다는 걸 안 보쿠토의 얼굴이 목덜미까지 붉어졌다. 아프지 않게 표면을 맴돌던 혀가 조금 힘을 실어 상처를 누르고, 쓸어 올렸다. 작은 모래알갱이들이 타액에 섞여 혀가 쓸어내는 대로 혀의 미세한 돌기 사이로 미끄러지며 뽑히는 느낌이 소름끼치게 선명했다. 허공에 내밀어져 있던 손이 어느 새 바지자락을 꽉 붙잡은 채 희게 질려 있었다. 상처를 쓸어 올리는 혀는 심지가 단단하게 서서 다소 날카롭게 상처를 훑기도 했고 그저 물렁하게 상처 위를 덮었다가 멀어지기도 했다. 아무런 소리 없이 입을 뗀 아카아시의 입술에 피가 섞인 타액이 길게 늘어졌다. 보쿠토는 그 곡선을 따라 건너면 아카아시의 입술에 닿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서 무심코 작은 머리를 아카아시에게 숙이려고 했다. 그를 모르는 아카아시는 신발바닥을 받쳤던 손등을 뒤집어 손수건으로 무릎과 입술 사이에 늘어진 다리를 슬쩍 걷어냈다. 보쿠토와 아카아시의 사이를 연결시켜주던 다리가 끊기자 작은 머리가 멈췄다. 아카아시는 손수건으로 피가 엉겨 묻은 입술을 가렸다. 혀를 굴리는 듯 볼이 조금 볼록거렸다. 손수건을 슬쩍 떼어내자 벌린 입술 사이로 모래가 점점이 섞인 타액이 흘러내렸다. 핏물이 엉긴 치아가 하얬다. 작게 벌렸던 입술을 다물고 입 속을 혀로 굴려 바닥에 뱉어내자 남은 모래와 피가 모래 위로 떨어졌다. 아카아시는 볼을 홀쭉하게 하며 몇번 더 모래와 피를 뱉어내고 난 후에야 입 속에 남은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손수건을 반으로 접어 입술을 토닥토닥 닦아냈다. 그리곤 한 번 더 접어 축축한 무릎을 톡톡 두드렸다.

"아팠어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좌우로 빠르게 휘저어 졌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자, 다쳤으니까 병원이든, 집이든 가요. 더 놀 순 없을 것 같네요. 아카아시는 손수건을 엉성하게 들고 보쿠토를 안아 올렸다. 목덜미에 닿은 작은 머리가 유난히 따뜻하다 생각한 아카아시가 주말이 지나고 등교할 땐 원래대로 돌아오길 바랄게요, 하고 이야기 했다. 작은 머리가 목덜미에 부벼질 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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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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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쿠아카] 생각

보쿠아카 2016. 8. 10. 00:26

여느때와 같은 소음이 가득한 체육관은 저녁이 되면 한산해 진다. 쪼그려 앉아서 숨을 고르는 동안 반듯한 이마를 타고 흐른 땀이 아직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뺨을 따라 흐르다 진득하게 떨어져 내린다. 부원들은 모두 집으로 향했다. 이따금 그렇게 부원들이 돌아가고 난 뒤에도 아카아시는 남아있었다. 열을 끓어 올리던 한창때의 학생들이 빠진 체육관은 누군가가 뿌린 파스냄새와 체육관 특유의 냄새가 가득했고, 서늘했다. 살짝 소름이 돋은 팔을 손바닥으로 감싸 몇번 쓸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여섯 명이 하는 배구지만 세터는 사령탑이다. 그 누구보다 냉철해야 하며, 그 누구보다 뛰어난 집중력으로 상대를 읽어내야 한다. 완벽한 세터는 백퍼센트, 그 이상으로 팀의 능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세터다. 천재적인 카라스노나, 천재를 찍어 누를 센스의 아오바죠사이나, 다른 이들이 단단히 받치고 있는 네코마, 에이스를 믿지 못할 충성심으로 따르는 시라토리자와같은 학교들과는 길을 달리하는 만큼 다른 방식으로 나아가야 했다. 견본이 없다는 건 그만큼 답답하고, 힘든 길이다. 아카아시는 코트도 치워진 넓은 체육관에 덩그러니 서서 차가운 공기를 만끽하다가 한 가운데에 주저앉았다. 늘 코트를 꽉 채우는 사람들과, 환호와 탄식이 엇갈리는 경기와는 또 다른 공기는 새로운 감각을 부르기에 충분했다.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발을 널부러 놓고 다리 사이에서 공을 작게 튕기며 당일 연습경기를 되돌아 보았다. 컨디션이 안 좋았던 사람, 유난히 컨디션이 좋았던 사람, 그 와중에 컨디션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일정하게 플레이 하는 사람, 손이 평소보다 많이 가는 사람, 새로운 걸 연습하거나, 생각하는 것처럼 반응이 미묘하게 다르던 사람. 손가락이 공위에서 제멋대로 굴러다녔다. 손바닥 전체를 뭉근하게 문지르기도 하고, 손목까지 지압하듯 굴리다가 팔 언저리에서 손끝까지 되돌아오고. 그러다 문득 아무렇게나 벌리고 앉은 다리를 보면 보쿠토가 생각난다.


아카아시의 다리는 거의 시합 내내 압도적으로 강한 점프를 해 내야 하는 보쿠토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아카아시는 길고 가느다랗고, 유연한 근육이었다. 쭉쭉 뻗어서 울퉁불퉁하거나 무겁게 자라지 않는 종류의. 오히려 팔이 더 단단하지. 공에서 뗀 손을 쥐락펴락하고 있자면 잘 정리된 손톱이 조금 자라있다. 정리 할 때가 됐다. 엄지손가락으로 다른 손톱의 끝을 문질렀다. 보쿠토의 다리는 좀 더 탄탄하고, 펌핑이 잘 되는… 이를테면 벌크업 상태를 항시 유지하는 근육 같았다. 점프를 하게 위해 내려앉으며 팔을 뒤로 뻗으면 팽팽하게 당겨진 팔과는 다르게 허벅지나 종아리는 금방이라도 터질 폭죽처럼 부풀어 오른다. 그러다 점프하면 코트 위로 그 맹수를 닮은 눈동자를 쑥 올려내는 것이다. 그 눈은 딱히 마주해도 상관은 없지만, 한순간 눈빛이 흔들리게 된다. 아카아시는 그 같은 맹금류는 아니었다. 보쿠토는 털이 한껏 부풀어 오른, 사냥 직전의 부엉이 같은 눈동자로 상대를 본다. 스쳐지나간다고 할 만큼 짧은 순간이지만 그 눈을 마주하면 떨게 된다. 공포라기엔 부족했고, 온 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전율이라고 하면 엇비슷한 비유가 될 것 같았다. 희번득이는 눈동자는 떠올리기만 해도 온몸의 근육이 바짝 긴장하게 만든다. 저도 모르게 흠칫 떨린 허벅지 근육을 공으로 눌러 문지른 아카아시는 한숨을 쉬었다.



체격차이도 많이 나는 두 사람은 파이팅을 외치느라 손을 한 데 모으려 내민 팔의 두께나 색에도 차이가 났다. 조금 가늘고 흰 편인 아카아시와는 다르게 번개 떨어지는 소리를 내는 스파이크를 날리는 보쿠토의 손은…. 아, 젠장. 아카아시가 몸을 잔뜩 웅크렸다. 망할. 눈을 꼭 감고 입술을 사려 문 채 이마를 차가운 바닥에 대고 있다가 옆으로 데굴 굴렀다. 어린 아이처럼 웅크린 몸 한 가운데에는 공과, 바짝 긴장한 배가 맞닿아 있다. 탄식처럼 숨을 내뱉으며 아랫배를 누른다. 벌겋게 달아오른 귓불을 찬 바닥에 부벼 열을 식히려다 식은땀이 고이는 이마를 바닥에 눌러 문질렀다. 피부가 짓이겨지는 고통은 이미 변질되어 신경 말초를 자극했다. 아카아시는 잔뜩 웅크리느라 맞닿은 허벅지가 저도 모르게 비벼지는 느낌에 스스로 최악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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